[아날로그 감성이 데려온 윤리소비의 즐거움] 지난 여름은 너무 더웠다. 지구 온난화가 북구의 스웨덴까지 침범한 걸까. 더위에 지친 나는 가을의 문턱에서 겨울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결정한 곳은 9월말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해 이듬해 여름까지 눈이 덮여 있는 겨울의 땅. 아비스코.
스웨덴이 길다랗게 생기다 보니 남쪽과 북쪽은 사람들도, 사투리도, 기후도 많이 다르다. 북쪽에 위치한 지역(Norrland) 중에서도 가장 끝자락(Lappland)에 있는 아비스코(Abisko) 나르빅 산자락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있는 웁살라에서 기차로 17시간이다.
재작년 코펜하겐 환경총회 관련 동영상 중에 참가자들에게 “여기까지 오는데 무엇을 타고 왔는가?”라는 질문의 인터뷰가 있었다. 환경에 대한 의식이 있다면 가까운 곳에서 올 때 이산화탄소를 무더기로 배출하는 비행기를 타지 않았을 것이라는 예상이 담겨 있었지만, 답변을 통해 기대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질문의 의도를 눈치채고 답을 피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교가 스웨덴에 있는데다 전공 분야도 지속가능개발이다 있다 보니 총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같은 학부 친구들 다섯은 총회 일주일 전 웁살라에서 코펜하겐까지 7박8일 자전거를 타고 갔다. 환경총회 참여자라면 환경에 최소한의 영향을 주는 수단을 이용해야 하고, 대안 교통수단으로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싶다는 것이 친구들의 주장이다. 일주일 자전거 탈 시간이 없거나 체력이 그 정도로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차를 탔다. 스웨덴 기차는 친환경 교통수단으로 비행기보다 열 배 비싸고 열 배 느리지만 이산화탄소배출량이 ZERO, ‘0’다.
나도 학생 환경 총회에 참여할 때 스웨덴 웁살라에서 오스트리아 비엔나까지 25시간 기차를 타고 갔다. 친구들 중에 크리스마스나 방학에 집에 갈 때도 기꺼이 올래 걸리고 비싼 불편과 부담을 선택하는 녀석들이 많다. 주위에 그런 친구들이 많다보니 가까운 곳에 휴가 갈 때 비행기를 예약하려다가 나도 모르게 문득 주저하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서는 불편을 감내할 용기도 있어야지. 이렇게 시작된 기차여행. 의외로 이 아날로그 교통수단은 매력이 있었다.
노트북을 들고 가, 기차 안에서 영화나 볼까 하다가, 그 동안 지나치게 컴퓨터에 의존했던 삶을 좀 아날로그 모드로 되돌리고자, 흥미진진해 보이는 추리소설책 한 권, 유기농 감자칩 큰 거 한 봉지, 과일 몇 개 챙겨 짐을 쌌다. 계란도 삶으려다 말았다. 소금 챙기기 귀찮아서.
기차 안에서, 그리고 내려서 본 아비스코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왔다. 달력 사진을 파노라마로 보는 것 같았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광대한 아름다움, 비행기에서 찾을 수 없는 여유. 얼음처럼 차가운 청회색의 넓디 넓은 호수,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아비스코 국립공원에 등산을 갔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이 지구 온난화로 변해 버려 다음 세대가 누릴 수 없으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비행기 탈 때 보다 동그라미 하나 더 붙어 나온 기차 영수증에 대한 속쓰림이 사라지고 기차 타고 오길 백번 잘했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첨엔 윤리적 또는 이념적 이유로 기차를 선택했지만 이젠 기호의 영역으로 넘어 갔다. 기차 여행이 너무 좋다. 일단 도시 중심에서 도시 중심으로 떨어져서 공항까지 버스타고 움직일 필요가 없다. 시간도 에너지도 절약된다. 사육 당하는 기분이 드는 비행기와 달리 기차 안에서는 자유롭다. 늘 귀찮게 하던 문명에서 해방되는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거기다 왠지 낭만 있지 않은가? 비록 '비포 선라이즈'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다음 주엔 파리에 가는데, 역시 25시간의 기차 여행을 감행하기로 했다.
목적: 다음주 수요일에 파리에 도착하는 것
선택A: 기차(비용: 200유로, 소요시간: 25시간)
선택B: 비행기(비용: 24.9유로(저가항공 이용 시), 소요시간: 2시간)
많은 사람이 당연히 빠르고 저렴한 비행기를 타기로 결정지을 것이다. 하지만 가는 동안의 경험, 즐겁고 쾌적한 기분에 더해 내 선택이 환경에 보탬이 된다는 뿌듯함이라는 비물질적 가치가 의사 결정 과정에 개입하면, 비행기표 값보다 더 지불하는 추가 비용과, 그 반대 급부로 내가 얻는 정신적 만족감 사이에 저울질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저울이 기우는 쪽의 상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게 기차가 되었다.
나의 소비 성향을 결정하는 것이 가격표가 아닌 신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장의 법칙에 보내는 미약한 경고라고 할까. 지금까지 내 눈에 비친 신자유주의 시장의 법칙은 인간을 상품화 하고, 결국은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제도적•이념적 도구다. 만약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진다면 공급자들이 당황하겠지? 그리고는 환경을 생각하고 인간을 존중하는 방법으로 생산하고 공급하는 법을 고민하게 되겠지. 내 생에 그 변화를 다 경험하지 못해도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면 좋겠다는 바램을 담고 기차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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