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간 할인마트도 백화점도 가지 않고, 쇼핑을 끊으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투표할 때의 마음가짐으로 살 물건을 고르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소비를 빼놓고 현대 사회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만큼 소비활동은 현대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근간이다. 특히다가오는 자율과 창조의 시대를 이야기하려면 소비는 더욱 중요해진다. 계획과 지시와 통제가 지배하던 시대, 소비는 낭비와 동의어처럼 여겨졌다. 검약과 저축만이 미덕이었다. 그 대척점에 서 있던 소비는 비도덕적 행위처럼 여겨지고 규제와 문화적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였다.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저녁 9시뉴스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해외여행객 급증 현상에 대한 탄식이었다.
소비는 이제 창조적 활동
그러나 자율과 창조의 시대,소비는 이제 사회에 가치를 가져다 주는 창조적 활동으로 칭송 받는다. 실제 소비자 태도조사는경제가 살아나는지 여부를 가리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로 여겨진다. 소비자가 소비를 늘리겠다고 생각하고있는지 아닌지 여부를 물어보고 향후 경제 동향을 예측한다는 얘기다. 소비가 늘어야만 경제가 살아난다는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수많은 광고가 우리를 둘러싸고 소비하라고 유혹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소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고 믿기도 한다. 명품족은마음에 드는 브랜드를 소비하면서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고, 가족들은 짝을 지어 할인점에 가서 카트를 밀면서서로간의 끈을 확인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제대로 소비하고 있을까?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정말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않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주어진 몇 가지 답 중에서 선택한다.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식사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나면, 우리 앞에는롯데리아와 맥도널드와 버거킹이라는 단순한 선택지가 주어질 뿐이다. 그 선택지를 지배하는 것은 기업이다. 소비자 개인은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그저 기업이 준 사지선다형답안지 위에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사실 소비자가 기업의 입김에서 벗어나 주체성을 갖고 능동적으로소비하기 시작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도 무서운 존재로 부상할 수 있다. 기업보다도 정부보다도 노동조합보다도 강할 수 있는 게 소비자다. 그렇게 무서운 소비자가 되려면, 무엇보다 주체적 소비가 필요하다. 주체적 소비는 자율과 창조의 시대에알맞은 소비 행태이기도 하다.
1년간 쇼핑 안하기
쇼핑광이던 미국의 주디스 리바인/폴 칠로 커플이 쓴 책 <1년간 쇼핑 안하기>(Not Not Buying It: My Year Without Shopping)는 창조 시대에 맞는 주체적소비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디스 리바인은 만 50세이던지난 2003년 연말, 물건을 잔뜩 채워 넣은 쇼핑백을 들고걷다가 뉴욕 거리의 물웅덩이에 빠뜨렸다. 연말 바겐세일을 맞아 신용카드를 한도까지 그어 쇼핑을 한 뒤의일이었다. 순간 들어서는 거대한 회의감. “쇼핑이 내 인생에서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일까.” 주디스는 매년 같은 시기 들고 다니던 그 커다란 쇼핑백의 무상함을 순간적으로느끼며, 남자 친구인 폴 칠로와 상의해 실험 삼아 1년간쇼핑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주디스는 물건을 모두 생필품과 사치품으로 나누고, 생필품만으로 소비를 제한하기로 했다. 주디스와 폴은 맨 처음 어떤것이 진짜로 필요한 ‘생필품’이고, 어떤 것은 사지 않아도 되는 ‘사치품’인가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이견도 많았다. 이탈리아인인폴은 와인 생필품으로 간주했지만 주디스는 사치품으로 여겼다. 결국 폴이 와인을 사지 않고 직접 만들어먹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비누와 빵, 고양이사료, 화장실용 화장지는 생필품에, 아이스크림, 화장용 티슈, 소다음료는 사치품으로 분류됐다. 비싼 옷과 스타벅스 커피, 싱싱한 꽃도 사치품에 넣었다. 주디스는 스타벅스 커피 대신 집에서 직접 커피를 만들어 마시기로 했다. 책도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하지만 신문(뉴욕타임스)은계속 구독했다. 사실은 생필품과 사치품을 나누는 작업 자체가 두 사람에게는매우 소중한 경험이 됐다. 두 사람은 일년 내내 생필품과 사치품을 구분하기 위해 토론을 했고, 그 과정에서 도시인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치품에 둘러싸여 있는가 하는 점을 느끼게 됐다.
소비를 줄였더니 가장 먼저 생긴 변화는 뜻밖에도 “친구가 보였다”는 것이었다. ‘생필품’을사는 데만 쇼핑을 제한하니, 소비에 사용되는 에너지와 시간이 줄어든다.또 신용카드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려 소모되는에너지와 시간이 줄어든다. 1년간 쇼핑을 절제해 8천 달러(800여만원)이나 절약했으니 당연했다. 당연히 친구나 이웃에 대해 쏟는 에너지와 시간이 늘어났다.
특히 주디스와 폴은 친구들과의 외식도 사치품의 일종으로 분류했다. 그래서 친구들과 외식을 하면 벌금을 물기로 규칙을 정했다. 그러다보니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함께 하는 일이 많아져서 오히려 더 가까워진다. 소비와 돈을 버는데 쓰던 신경은, 가족을 생각하고 안부를 묻는 데로 쏠리기도 했다. 사실 우리 생활에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빼면, 보다 많은 시간과 열정과 돈을 사회와 친구, 가족에게 기여할 수있게 된다.
윤리적 소비, 소비는 투표다
소비가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는데, 소비를 줄이면 경제가 나빠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경제학자가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경제를 숫자로만 생각한다면 단기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소비가줄면 실제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생활이고 삶이다. 엉뚱한 곳에 돈을 써서 괴로운 경험을 떠올려 보자. 카지노에 가서도박으로 돈을 쓴다거나, 너무 큰 집을 사느라 빚을 내서 그걸 갚느라 평생 고생을 한다거나, 커피나 담배 같은 기호식품을 너무 많이 소비해서 건강을 해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낭비된 돈도 모두 경제성장률에 잡힌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 같은 대형사고도 경제성장률에는플러스 효과를 줄 수도 있다. 사고 현장을 복구하고 건물을 다시 올리는 데 투입되는 자원이 경제를 성장시키는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풍백화점 붕괴가 우리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할수 있는지?
이 정도만 생각해 봐도, 그저경제성장률만 높이는 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진다. 까다롭게 소비하면 당장 성장률은 떨어질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소비자가 주체적으로 소비함으로써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데 초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가 중요하고 왕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늘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져 온 것이 사실이다. 기업들이 생산해 주는상품을 소비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체적 소비는 기업들을 변화시킬 여지도 보여준다. 능동적 소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런 능동적 소비자를 일컬어 “소비는 투표”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윤리적 소비”(Ethical Consumption)이나 “사회 책임 소비”(Socially Responsible Consumption)라는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소비자가 선택하는 물건의 속성이나 그걸 만든 기업에 따라 세상이 바뀐다는 이야기다.
기업들의 적응력이 얼마나 빠른가. 소비자가 바꾸기 시작하면 기업도 바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주디스리바인처럼 소비하는 소비자가 늘어난다면, 생필품 중심, 체험중심, 자연친화적 제품을 기업들이 더 많이 내놓을 유인이 생긴다. 자연친화적제품, 소비자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제품을 내놓는 기업이 생겨나고 그들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경제 전체에 낭비가 줄게 된다. 궁극적으로는 경제성장률과 사람들의행복 사이의 괴리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과자들에 들어간 식품첨가물이 유해성 논란도관련이 있다. 유해성 여부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면서도, 소비자들이거부하는 태도를 보이자 바로 식품첨가물을 넣지 않겠다는 제과업체쪽 반응이 나왔다. 제과업체들은 식품첨가물 유해성 논란이 나오고 소비자들이 반발하자, 모든 과자에 최근 논란이 된 식품첨가물 7가지의 사용을 전면적으로중단하고, 천연 소재로 대체한다고 밝혔다. 이대로 나가면유기농 과자, 친환경 과자가 제과상품의 주류가 되는 날도 올 수 있다.주디스 리바인 식으로 말한다면, 잠깐의 입맛과 허영심만 채워주는 사치품으로서의 과자가 아니라, 진짜로 건강에 좋은 생필품으로서의 과자가 나온다는 이야기다.
미래 경제, 소비자가 기업을 바꾼다
이미 기업들은 대량생산과 광고에 의존한 기존의 푸시형 마케팅의한계를 깨닫고 있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엘리엇 에텐버스가 쓴 <넥스트이코노미>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미국의 경우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부머 세대가 은퇴를 시작하면서, 경제성격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베이비 부머 세대까지는 인구가 계속 늘어나는 경제 체제였다. 자동차가 대량으로 팔렸고, 주택 건설산업이 융성했다.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면서, 사치스런 소비생활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여피족” 같은 말이 생겨난 것도 이 시기다.
인구가 늘어나니 소비자도 늘어난다. 공급자에 비해 수요자가 많아지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수요공급 원칙에 따라, 공급자 중심의 시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기업은소비자의 마음을 하나하나 헤아리기보다는, 소비자 위에 군림하려 했다.기업의 언어를 소비자 억지로 머리 속에 각인시키려 했다.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와 관계 없이비슷한 제품을 대량생산해도 광고만 잘 하면 팔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이비 부머 시대가 끝나면서, 기업들은 이런 전략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시작하고 있다. 당연한일이다. 인구 성장률이 낮아지기 시작하면 수요자가 줄어드니, 수요공급 법칙에 따라 시장은 수요자 중심으로 급격히 변하게 되어 있다. 소비자 중심의 사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기업 전략도 당연히 바뀌게 된다. 소비자와는 이제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어야 한다. 푸시형 마케팅이아니라 고객 중심의 마케팅을 펼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 나온 개념은 고객 욕구를 세분화해 대응하는퀸타일 마케팅, 제품 구성부터 고객과 함께 하는 마케팅, 다양한다른 브랜드와 함께 펼치는 코마케팅 등의 새로운 마케팅 용어로 포장되어 나왔다.
공급자인 기업은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 있는데, 수요자는 점점 줄어드는 상황. 당연히 고객과의 관계성 강화가 생존을위해 필수적이다. 특히 소수 소비자라도 높은 충성도를 갖도록 만드는 전략의 유효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소비자가 상품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도록, 진정한 욕구를반영하려는 상품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물론 이는 모두 한국에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는 이야기다. 출산율 저하와 인구 성장 둔화는 이제 이론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이다. 줄어들기시작하는 기업과의 줄다리기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시기가 왔고, 이에 맞춰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에귀를 기울이는 기업이 성공할 수 있는 때가 됐다. 이제 소비자는 대통령 뽑고 국회의원 뽑을 때만 투표하는 게아니다. 백화점이나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 고를 때도 투표하는 것이다.카트에 어떤 물건을 담느냐에 따라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근처 한살림, 아이쿱, 두레 등 생활협동조합이나,초록마을 등 친환경 전문 매장, 아름다운가게 등 재활용 가게 등을 찾아가면 된다. 이로운몰(링크) 같은 온라인 쇼핑몰도 있다. 구매하고 나서 체험기를 써서 한겨레경제연구소의 ‘윤리적 소비 체험수기 공모전’(링크) 등에 제출하면 비슷한 소비생활을 하는사람들과 생각도 나누고 잘하면 상금도 챙길 수 있다. 소비는 투표이고,소비자는 시민이고, 소비 체험 나누기는 미디어 행위인 셈이다.
출처: 한겨레경제연구소 착한경제블로그 http://goodeconomy.hani.co.kr/archives/240
작성일: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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