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서 충남 부여에서 4년째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쌀 한 톨 버리지 말라는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터라 먹거리에 대한 나름 겸허한 습성을 익혀왔다가 자부했는데, 귀농하여 직접 내가 먹을 것을 생산하다 보니 그 동안 겸허한 습성이라 여겨왔던 자부심조차 교만과 착각이었다는 반성을 합니다.
여기서 짓는 모든 작물은 무농약, 무화학비료, 무비닐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석유화학이 우리 농업에 침투하기 전에는 누구나 당연하게 농사짓던 방식이었지만 몸소 겪어보니 과거 우리 농부님들이 얼마나 힘들게 먹거리를 생산해왔는지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단지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련의 노동행위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관련지식 외에도 더 귀한 것을 얻게 됩니다. 즉 우리의 몸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이 단지 부모님이 물려준 유전적, 생물학적인 구성일 뿐만 아니라, 나의 머리털과 심지어 배설물까지도 모든 것이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어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도 없어지는 소위 연기법(緣起法)을 터득하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생기면 나를 비롯한 모든 생명 있는 것들, 아니 생명 없는 것들까지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윤리적 소비’가 출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아내가 자주 이용하는 인터넷카페(웰빙라이프를 추구하는 컨셉의 꽤 유명한 카페)를 엿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회원들은 환경문제와 가족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의복과 주거환경뿐만 아니라 음식물을 담는 용기도 스테인리스나 유리재질 등 인체에 무해한 것만 사용하고, 먹거리를 얻기 위하여 친환경매장을 주로 이용하느라 적지 않은 지출을 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자녀들에게도 합성첨가물이 배제된 간식만 먹게 하며, 심지어는 자녀들의 교육문제도 서로 공유하면서 과잉보호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챙겨주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야 이보다 더 합리적인 소비가 또 있을까 싶어 보였습니다. 물론 우리가족도 한때는 이러한 삶을 살기도 했고 지금도 그 중 일부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두에 언급했듯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왕이면 친환경적이고 공정한 노동에 의해 생산된 것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만, 그보다는 더욱 우선되어야 할 것이 적게 입고 적게 먹고 적게 쓰는 최소한의 소비방식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윤리적 소비라는 것을 전제로 이 글을 쓰고자 합니다. 즉 합리적인 소비와 윤리적인 소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쇠스랑으로 밭갈이를 할 때면 늘 한가지씩 테마를 가지고 명상을 합니다. 이 작업이 힘은 들지만 워낙 단순반복작업이라서 심심해서(?) 그런 짓을 하게 된 모양입니다. 지난 주부터는 이 수기를 쓰기 위해서 [윤리적 소비]라는 테마를 가지고 며칠간 명상을 했습니다. 과연 세속적인 관점으로 ‘윤리 + 소비’ 가 서로 결합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화두였습니다.
과거 100여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소비는 미덕’이라면서 앞다투어 경제발전의 중심정책으로 삼아오다가 그 결과로 환경오염과 자원고갈, 빈부격차심화, 지구온난화, 이상기후, 생태계 왜곡 등의 파국으로 치닫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를 그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윤리를 담아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윤리를 앞세워 소비를 현명하게 잘하자고 해도 결국은 한정된 자원을 그전보다는 조금 천천히 갉아먹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 앞으로 30년 후에 파멸할 것을 50년쯤 후로 미루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속 가능한 상생을 위해서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아끼고 친환경적인 소비패턴으로 바꾸자는 정도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그 카페에서는 지난 봄에 유명한 스테인리스업체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주방기기공동구매 행사를 실시하더군요. 스테인리스 소재의 냄비, 프라이팬, 밀대, 찜기 등등 이미지로만 봐도 참 예쁘게 생겨서인지 공구를 개시하자마자 순식간에 그 많은 물량이 동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부 자기 집에 한두 개쯤은 이미 갖고 있는 것입니다. 기존의 것이 쓸모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저 새것이 갖고 싶은 욕구에 끌려 모두가 휩쓸린 것입니다. 새로 산 것에 밀려서 약간 낡은 용기들은 어딘가로 쳐 박히거나 버려지겠지요. 이것이 그들 자신이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착각해왔던 소비방식입니다.
이 같은 소비행태를 윤리적 소비와 나란히 하기엔 너무 부끄럽습니다. 단언컨대 참다운 윤리적 소비가 되려면 ‘’무소유’에 가깝도록 소비수준을 끌어내려야 합니다. 여기서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말자는 개념이 아니라, ‘꼭 필요치 않은 것은 갖지 않는 것’ 입니다. 속세의 우리는 출가하여 수도하는 분들처럼 살 수는 없을 테니 그 수준 근처라도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안 세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원하는 것을 구입하지 말고, 열 번 이상 생각해봐도 누가 봐도 꼭 필요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만 구입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충동구매를 자제함은 물론이거니와 무엇이든 한 번 살 때는 내구성이 뛰어나고 수선 및 재활용가능성이 높은 것만을 선택하자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장롱 속에 있는 옷만 하더라도 잘 고치고 꿰매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것입니다. 새로 옷이 필요하다면 중고매매 사이트에서 사던지, 유행 따위는 집어치우고 피부보호와 체온조절기능을 주목적으로 하여 값싸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을 고르면 됩니다. 먹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도시의 소비자들이 눈과 입맛을 기준으로 고르던 기준을 벗어나서 몸의 건강에 필요한 양질의 것으로 최소한만 골라 사먹는다면 공장식 축산과 관행농법으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부작용이 거의 해결될 것입니다.
둘째, 이 지구는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의 후손도 이어받아 살아갈 터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식들에게도 윤리적인 지구사용법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장거리 이동일 때에도 자가용보다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하고, 이를테면 편도 5~10km까지는 자전거를 타게 하고 그 이하 거리는 무조건 걷게 하는 습관을 갖게 하면 아이의 건강과 나아가 미래의 환경문제가 대부분 해결됩니다. 여기 시골에도 하루 대여섯 차례 읍내로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한 번 버스를 놓치면 2시간 혹은 4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급하게 우체국으로 큰 짐을 택배 부치러 가야 할 때면 마을 버스는 고사하고 아무거나 굴러가는 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또한 저는 가끔 밥상 앞에서 별 까닭 없이 입맛이 없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지금 내가 배가 덜 고픈가 보다’ 라고 자책을 합니다. 어릴 때 배가 고파서 신 김치 한가지만으로도 밥 몇 공기를 해치울 때를 기억해내고 지금 이 밥상에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 비위 맞춘답시고 수시로 간식 사주거나, 밥상 앞에서 투정 하는 아이들 앞에서 쩔쩔매는 부모는 윤리적 소비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어른이고 아이이건 밥투정하면 밥상을 치우고 몇 끼니만 굶기면 못된 습관은 쉽게 고쳐집니다. 나보다 궁핍한 입장에 처하여 하루에 밥 한끼조차 먹지 못하는 아이들과, 자전거조차 없어서 수십 리를 걸어 다니는 이들을 생각하게 하는 체험(교육)을 한다면 지금 내 조건이 얼마나 감사하며 행복한 일인지 알게 되어 저절로 윤리적인 소비의 길을 가게 될 수 있지요.
셋째. 개개인의 소비철학이 다운사이징 선순환 구조로 가야 합니다. 내 몸(입)의 편리함(달콤함)은 곧 남의 도움이나 돈을 필요로 합니다. 남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나도 도와야 하는 빚이 남는 것이요, 더 많은 돈을 쓰기 위해서는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합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을 먹기 위해서 그에 맞는 돈을 벌어야 하고, 먹고 나니 살쪄서 뵈기 싫다고 다이어트 하느라 또 돈을 벌어야 하는 악순환의 반복은 그쳐져야 합니다. 혹자는 먹는 쾌락도 있고, 살 빼는 쾌락도 있기 때문에 둘 다 즐기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둘 다 즐기기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텐데, 죽을 때까지 그 쾌락을 위한 돈벌이에만 매달려야 하겠습니까? 차라리 덜 먹고 살 안 쪄서 더 건강하고, 그 건강한 몸으로 돈벌이보다는 다른 삶의 보람을 추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내 쾌락을 이루기 위한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버는 만큼만 맞춰서 쓰는 구조가 궁극적으로는 윤리적이면서 합리적인 소비로 향하게 합니다.
소비자가 좀더 친환경적인 것을 찾고, 먹고 입고 살아가는 모든 제품의 생산과정을 속속들이 학습하여 똑똑한 소비를 하는 것 정도로는 작금의 위기가 크게 해소되지 않습니다. 좀더 근본적인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남들에 비해서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이만해도 다행이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살아가는데 충분하다는 자기긍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삶의 끈을 남에게 쥐어준 채로 삽니다. 어려서는 부모님, 몇 년 더 지나면 학교, 성인이 되면 직장상사와 동료에 의해 나의 인생이 휘둘리고 삽니다. 늘 남의 눈치를 보고, 남과 비교하여 남의 잣대로 나를 평가하여 이리저리 휩쓸립니다. 그러다 보니 티셔츠 한 벌을 사더라도 남들에게 어떻게 비춰질까를 먼저 고려합니다. SNS나 뉴스기사에 글 한 줄을 쓰더라도 남들이 내 글을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며 내 생각이 아닌 남들의 비위에 맞는 글을 쓰곤 합니다. 어떤 지인은 카페나 SNS에 자기 가족과 어딜 놀러 다니고 자식이 무슨 짓을 하고,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보고, 무슨 요리를 해먹었는지를 거의 매일 일기처럼 올려둡니다. 그에 대해서 그의 친구들은 경쟁하듯이 서로 치켜세워주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한다는 의미의 멘트를 남깁니다. 서로가 경쟁적으로 좋은 요리를 해먹은 것을 자랑하고, 자식에게 어떤 좋은 옷을 입힌 것을 자부심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늘 남을 의식하면서 사는 삶은 곧 경쟁적인 소비가 되고 과잉소비가 되므로, 아무리 그것들을 전부 친환경매장에서 구입했다 하더라도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비윤리적인 소비로만 보입니다.
오래 묵혀온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쉽게 바뀌긴 힘듭니다만, 지금의 내 상태가 위기라는 것을 알면 의외로 쉽게 바뀌기도 합니다. 나의 위기는 가족의 위기가 되고, 가족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이며 곧 모든 생명체의 위기가 됩니다. 거꾸로 남의 위기는 곧 내 위기가 되는 것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아직도 살만하다고, 우리의 환경이 적어도 내가 죽을 때 까지는 별일 없을 거라는 안이한 마음상태로는 점점 데워져 가는 냄비 속의 개구리의 운명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기왕 이번 공모전을 계기로 윤리적인 소비에 관심을 가졌다면 기존에 알아왔던 합리적 소비를 뛰어넘어서 더 높은 차원의 윤리적 소비의 길을 함께 가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나와 가족과 이웃과 후손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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