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와서 여행 하지 않는 사람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유럽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지내며 여행했던 나라들이다. 27개 도시의 거리를 누비며 느꼈던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사람들 참 여행 많이 한다’ 는 것이다. 런던, 파리 등의 필수 여행지가 아닌 포르투갈 리스본에서도 레스토랑 웨이터가 ‘아저씨, 여기 와 봐’ 라고 호객행위를 할 정도 였으니. 거리 상으로 멀리 떨어진 유럽이 이 정도니 가까운 동남아나 일본,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있을지 짐작할 만하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객들은 2가지 타입으로 분류된다.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구입해 여행을 즐기는 어르신들이나 가족 단위 관광객이 첫 번째라면, 스스로 비행기표부터 숙소까지 예약하는 20대 초중반의 대학생 혹은 소수의 신혼여행객들이 두 번째 유형이다. 나 역시도 이들처럼 ‘독립적으로’ 유럽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30유로(약 5만원) 짜리 저가항공을 타고 8유로(1만 2천원)에 하룻밤을 묵으면서 아낀 돈으로 우리는 나름의 유럽을 즐긴다. 유명한 박물관에 가고, 블로그에 소개된 맛집을 찾아가 대표메뉴를 먹고, 유명한 벼룩시장에 찾아가 쇼핑을 하고, 랜드마크 앞에서 사진을 찍는 등이다. 아울렛에서 구매한 상품에 대해서 택스리펀을 받는 것도 단기 여행객에게는 필수코스이다. 그렇다면 한 번 돌아보자. 우리의 여행은 한국에서의 일상생활과 무엇이 다른가. 유럽의 거리라는 배경을 빼고는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새로운 것을 체감하기 위해 간 여행인데도 말이다.
3주 간의 마지막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즈음, 문득 지난 1년 중 4달 가까운 여행 기간 내에 찍었던 사진들을 천천히 넘겨봤다. 폴더와 날짜만 바꿔놓으면 차이점을 구분하지도 못할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분명 미리 계획을 세워서 방문했고, 신경 써서 찍은 사진인데도 말이다. 마지막 여행은 새로운 방식으로, 조금 더 의미 있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를 가능케 할 조건들을 꼽아보았다. 첫째, 다른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인을 만나야 한다. 둘째, 나의 여행 경비가 의미 있게 소비돼야 한다. 셋째, 나의 여행을 마음으로 기뻐하고 환영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정답은 바로 해외 자원봉사!
2주 가까운 장고의 기간 속에 선택한 것은 자원봉사였다.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자원봉사 시간만 겨우 채워왔던 내 마지막 여행에 자원봉사가 위치하게 된 데에는 세부계획에 앞서 세운 조건들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먼저 자원봉사는 지역 사회 혹은 각종 어려움을 겪는 현지인들에 대한 노동력을 제공하기에 직접적인 이해 관계자가 현지인이 된다. 이에 더해 참가비 등의 기타부대 비용은 기간 내 현지에서의 실질 생활비 및 전체 자원봉사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소요된다. 마지막으로 얼마만큼의 돈을 쓰느냐로 판단되는 일반적인 관광객이 아니라,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원봉사자로 방문하기에 나의 방문은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 어느 새 내 손은 자원봉사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다음 난관은 자원봉사를 할 지역을 정하는 것이었다. 기왕 자원봉사를 하기로 했으니 관광의 목적만으로는 가기 힘든 곳, 지금까지 갔던 곳과는 다른 곳을 가고자 했고, 최종 행선지로 정해진 곳은 바로 바이킹과 엘프의 나라, 아이슬란드였다. 그리고 아이슬란드 내에서도 수도 레이캬비크 인근이 아니라, 남쪽 해안가에 자리한 자그마한 마을 페트르시로 향했다. 라트비아, 스페인,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영국, 일본에서 보인 7명의 동료들과 함께 말이다.
착한 마을, 페트르시에서의 건강한 2주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3시간 가량 떨어진 페트르시는 열 개 가량의 농가가 모여서 이뤄진 작디 작은 마을이다. 부모 때부터, 혹은 그 전부터 페트르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각 농가는 마소 등의 목축업, 장기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 등의 다양한 수입원을 갖고 있는데, 내가 일하게 된 베르굴 아저씨와 론 아주머니의 농장은 당근 재배과 유제품 생산을 주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농장에서 나오는 모든 상품들은 윤리적 소비가 지향하는 그것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유기농으로 생산되는 당근과 감자는 지역 협동조합의 품질 인증을 받아 아이슬란드 내수용으로 판매되고 있었고, 유전자변형 옥수수가 아니라 광할한 들판의 풀을 먹고 자라는 50여 마리의 젖소에서 나오는 우유로 만들어진 치즈와 요거트 에서는 자연의 향이 물씬 느껴졌다. 그 곳에서 우리는 베르굴 아저씨와 론 아주머니, 그리고 2명의 장기 봉사자를 도와 하루 7시간의 일과를 2주간 지속해나갔다.
인터넷도 되지 않고, 작은 마트도 자동차로 30분을 넘게 가야 하는 곳에서 나는 일과 후의 하루하루를 착하게 채우는 법을 배웠다. 석양이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는 아무 장애물도 없는 들판을 가로질러 뜀박질을 했고, 유달리 초록이 아름다운 날이면 물 한 통 들고 뒷산을 올랐다. 팀 리더였던 크리스틴이 등산 중 발견한 들꽃들을 주머니 한 가득 넣어온 날이면, 숙소 가득히 들꽃 향기가 가득했다. 직접 몰아서 풀을 먹인 소들이 선물해준 우유에는 매일이 다른 맛이 숨어있었고, 이 우유로 만든 치즈는 공장에서 대규모로 생산돼 마트에서 팔리는 치즈와는 격이 달랐다. 이렇게 건강한 우유와 치즈, 그리고 직접 캔 당근으로 만든 당근잼과 당근케이크가 곁들어진 식사는 몸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건강하게 만들어줬다.
생각의 폭을 넓히면, 여행의 레벨이 달라진다
사실 모든 아이슬란드가 페트르시 마을 같은 것은 아니다. 대륙보다 오히려 북극에 가까운 위치, 섬 곳곳에 솟아있는 화산들과 그를 덮고 있는 빙하들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마법은 유럽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경관들을 만들어냈고, 이 조화를 보러 한 해 140만명(2011년 기준)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 대부분이 투어버스를 타고 관광지로 조성한 온천과 바다, 폭포와 빙하를 오가는 일반적인 여행객이고, 히치하이킹을 한다거나 도보로 남북을 가로지르는 등의 특별한 여행은 도전의식 강한 소수 청년들에 의해서만 이뤄지고 있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것은 유럽인들에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가항공이 발달한 유럽 내 에서도 직항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변덕스런 날씨와 험난한 지형으로 인해 차를 렌트하거나 버스투어를 하지 않으면 이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높은 물가로 인해 여행에 기초적으로 투자되는 비용 자체가 높을 수 밖에 없다. 나 역시도 2주 간의 자원봉사를 위해 항공권과 참가비 등 총 70만원에 가까운 돈을 투자했다.
여기서 혹자는 나에게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자원봉사 하러 70만원 낼 바엔 차라리 그 돈으로 여행을 하지 그랬냐’는 질문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선택의 이성적, 감성적 확신을 갖고 있다. 일단 70만원으로 아이슬란드 여행을 한다고 했을 때, 기존에 해왔던 것과 같은 식의 여행을 한다면 4일도 못 버티고 돌아가야 한다. 샌드위치 하나가 8~9000원에 이르는 물가 탓이다. 사실 2주간의 자원봉사 기간에서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만큼의 돈을 투자했느냐’가 아니라 ‘여행 기간 동안 무엇을 얻었는가’가 아닐까? 우리 8명은 다국적 렌터카 업체의 렌터카를 빌리지 않고도, 베르굴 아저씨의 차로 남쪽 해안가를 다 돌아봤다. 2시간 코스에 1인당 10만원이 넘는 빙하 탐험을 론 아주머니의 친분을 이용해 우리가 직접 캔 당근 한 상자로 해결했다. 단체관광객들이 가장 큰 폭포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갈 때, 우리는 직접 만든 먹을거리를 싸 들고가 폭포 앞에서 점심을 먹고, 그 힘으로 발길을 재촉해 남들이 지쳐서 가지 못하는 제일 뒤쪽의 폭포까지 모두 탐험했다. 게다가 2주 간의 자원봉사 기간 동안 관광지로서의 아이슬란드가 아니라, 삶의 터전으로서 아이슬란드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점점 줄어드는 청년 노동층, 지리적 위치로 인한 높은 물가와 불안한 내수경제, 천혜의 자연환경 뒤에 숨겨진 주민과 정부의 갈등 등 버스 창문 안에서는 절대 알지 못하는 사실들을 오며 가며 만나는 이들과의 대화로 알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이야기가 담긴 사진과 추억들을 얻었다. 런던과 로마에서도 얻지 못한 스토리가 나의 2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공정여행과 자원봉사는 결국 한 형제다
일반적으로 윤리적 소비와 관계된 여행이라고 하면 공정여행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리고 현재 대부분의 공정여행은 소수의 사회적 기업 또는 시민단체들에 의해서 이뤄지고 있고, 공정여행을 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은 결국 이들이 제공하는 선택지 중에 고르기 마련이다. 아무리 윤리적 소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상품 자체가 부족한 지금의 상황은 더 많은 소비자를 유인하기는커녕, 선택을 강요하다가 잠재소비자를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착한’ 여행을 하고 싶지만, ‘착하다는 것만으로는’ 여행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워크캠프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지 생산품 구매, 일회용품을 사용 자제 등의 개별적 행동은 윤리적 여행의 기반을 구성하고, 이를 토대로 한 윤리적 여행의 정신이 모여 모여 공정 여행을 조직화한다면, 현지에서 환경보호, 문화 및 사회적 인프라 구축, 아동 교육 등의 활동을 하는 워크캠프는 이 두 극의 중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후원하고, 공정무역을 실시하는 인도 오지의 농가를 방문하는 것만이 공정여행이 아니다. 오히려 공정여행을 그러한 틀에 가두는 것 자체가 윤리적 여행의 확산을 막고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소비자가 특정한 윤리적 소비를 하도록 통제하려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각각의 여행에서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결국 공정한 여행이란 각 여행자의 인식과 행동에서 가능한 것이니 말이다.
서울에서도 페트르시 마을을 느껴보자
2주 간의 워크캠프가 끝나고, 1년 간의 유럽생활을 정리하는 마지막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찾은 런던. 일반 관광객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보였다.
하루에도 런던 중심가와 교외 공항을 십 수번씩 왕복하는 공항 버스, 그리고 이를 운전하는 폴란드 출신의 버스 기사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과속으로 질주했고 그렇게 아낀 2분은 담배와 한숨으로 가득했다. 파키스탄 이민자들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호스텔 입구에는 미약한 와이파이라도 얻어보려는 젊은이들이 매일 밤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하룻밤 18파운드짜리 27인실 방은 숙박비를 아껴 관광을 더하려는 젊은이들로 이틀 내내 불 꺼질 새가 없었다.
서울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더욱 심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는 나도 관광객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슬란드에서 윤리적으로 소비하고, 착하게 여행했던 2주간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 아주 가끔은 서울에서도 페트르시 마을의 흙과 바람에서 느꼈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이 지겨워진 절은 그대여, 자원봉사를 하자. 새로워지기 위해 떠났던 여행이 비로소 피우는 건강한 생기의 꽃이 그대의 마음에 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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