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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수상작

[일반부문] (수기) 공정무역과 식품정의,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이준수

공정무역은 모두에게 공정한가! 그리고 착한 소비에 대한 문제제기

지난 5월 11일, 세계공정무역의 날. 한국에서도 행사가 열렸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다양한 공정무역 단체와 기업들이 모여 공정무역의 의미와 활동상을 전파하고 시식(시음)행사, 축제 등의 흥겨운 한마당을 펼쳤다. ‘먹거리 공정성’을 기치로 커피노동자(직원)협동조합을 결성한 우리도 이날 하나의 주체로서 참여했다. 멕시코 치아파스, 라오스 볼라벤,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등 3종의 공정무역커피와 우리가 직접 만든 캐러멜과 천연바닐라빈생크림을 들고 시민들과 어우러졌다. 며칠 전부터 공들여 준비한 커피와 레시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 출정한 터였다. 우리의 공식적인 첫 행사 참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봉박두. 행사장에 하나둘 시민이 늘어났다. 커피를 찾는 사람도 점점 많아졌다. 세 종류의 공정무역커피가 시간대별로 제공된다는 것과 더불어 우리가 직접 만든 레시피의 커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지는 오월의 햇살만큼 줄이 길게 늘어섰다. 끊임없이 손을 놀려 커피를 뽑고, 음료를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커피를 마셨다.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물었고, 커피가 맛있다는 말도 빠지지 않았다. 공정무역커피를 들고 온 다른 부스의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에게, 다른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맛있다’는 말만큼 좋은 말, 단언컨대 없다. 그건 하나의 주술이자, 마법의 주문이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나는 커피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것에 하나 더. 공정무역이 붙은 커피도 맛있다는 말, 우리는 그 말을 원했다. 그리고 그날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행사 현장에 나갔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공정무역커피도 맛있다. 우리는 증명하고 싶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맛있다며, 2~3번을 찾아온 시민도 있었다!) 우리는 그날 무려 600여 잔을 팔았다. 준비해갔던 커피를 다 소진하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넉넉하게 가져간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넘어선 호응으로 우리는 준비했던 공정무역커피를 모두 소진했고, 커피를 마시겠다는 줄이 서 있었음에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했다. 빙고!

우리가 협동조합을 만든 것도 ‘맛있는 공정무역커피’를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을 텐데, 우리는 공정무역커피라는 관계망을 통해서 만났다. 공정무역커피를 다루는 사회적기업의 커피노동자로서 안면을 텄다. 커피를 하고 싶었고, 그것도 공정무역커피를 통해 세상에 건강하게 발효되고 싶었던 내게, 그것은 좋은 기회였다. 스페셜티까지는 아니지만 공정무역커피도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즉, 맛과 향이 좋다는 것을 알리고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공정무역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커피가 주는 즐거움의 근원인 맛과 향까지 도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마리 토끼,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제동이 걸렸다. 커피의 맛과 향은커녕 회사는 턱도 없이 노동감수성이 부족했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몫을 주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한 노력 등도 의미도 좋고 그 노력도 좋았다. 그러나 정작 공정무역을 한다는 사회적기업의 노동자는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우리는 노동과 회사에서 소외돼 있었다. 민주적 운영과 절차는커녕 함께 일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우, 인식이 부족했다. 너흰 좋은 일을 하고 있잖아. 그런 사명감이면 충분한 거 아냐. 또 너희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우리의 노동은 충분히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커피의 맛과 향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도 번번이 무산됐다. 공부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조직이었다. 그저 공정무역이라는 의미에만 호소할 뿐.

국내 공정무역이나 사회적기업의 큰 문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구성원의 경제적 자립이 어렵다는 점도 그랬다. 좋은 의미를 지닌 좋은 일이라는 명분의 함정이 아닐까. 취약계층 고용만 한다고 끝나는 것이 사회적기업이 아니다. 이제는 공정무역커피보다 ‘맛있는’ 공정무역커피가 더 요구되듯, 일자리보다 ‘좋은 일자리’로의 업그레이드를 고민하고 이행할 때다. 그러면서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공정한 무역의 공정한 혜택을 보고 있는가? 사회적기업의 구성원으로서 행복한가? 사회적기업과 사회혁신은 동의어인가?
 
사회적기업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공정무역을 훼손하자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지 못하는 정책의 한계를 뚜렷이 경험했기에, 우리는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협동조합, 그것도 노동자(직원)협동조합. 더불어 우리는 바리스타가 단순히 반제품 조립노동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음식과 먹거리를 다루는 조리노동자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바리스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하겠다는 사람은 많지만, 기업형 프랜차이즈나 커피업계에서 바리스타는 실질적으로 불안정저임금노동에 시달리는 직업군일 뿐이다. 펌프질 몇 번으로 레시피를 익히고, 생산자와의 관계나 불평등한 세계 경제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반제품 조립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식재료에 대한 공부와 실험을 바탕으로 초콜릿, 캐러멜, 천연바닐라빈생크림 등 부재료를 주방에서 직접 만들어 쓰면서 조금씩 이것을 전파하고 있다.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스스로 기획하고 주도하는 노동자(직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의미만큼이나 맛에도 방점을 둔 ‘맛있는 공정무역 커피’를 제공하고, 카페의 노동과 다른 레시피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며, 먹거리를 의제로 하는 교육․강연 등이 가능한 공방을 차렸다. 우리의 필요와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맛있는 공정무역 커피 한 잔씩 제공하고 있다. 감당하기 힘들만큼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에, 소소하게 커피 나눔을 하고 있다. 원두는 팔고 있지만, 누구에게나 커피 한 잔씩 대접한다. 우리 덕분에 ‘공정무역 커피’가 맛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는 말도 몇 번 들었다. 공정무역커피가 맛이 없어서 안 먹었다는 사람들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연대를 추진할 수 있는 힘도 얻고 있다. 지역에 기반을 둔 ‘작은카페들의연대(소셜프랜차이즈)’다. 기업형 프랜차이즈가 노예계약 등에 기반하고 있다면, 소셜 프랜차이즈는 각 매장이 개성을 살리면서 협동으로 맺어진 동등한 관계를 형성한다. 프랜차이즈의 원래 뜻(Free from servitude․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에 가까운 형태다. 이것을 사업모델로 우리는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의 2013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팀으로도 뽑혔다.
 
아울러 우리는 공정무역커피에서 비롯하여 먹거리를 사회적 의제로 여긴다. 먹거리는 생존권은 물론 인권에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삶과 먹거리의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자아실현과 사회적 관계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를 먹을 권리를 의미하는 ‘식품정의’에 염두를 두고, 커뮤니티키친과 소셜다이닝을 준비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본다. 공정무역커피를 통해 세계를 바라고보 사유함으로써 우리의 세계도 좀 더 넓어진 셈이다. 전문성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란 사회문화적 산물이자 특정맥락에서 발아한 사회적 합작품이다. 우리가 협동조합을 만들고 사회적경제와 마을공동체, 공유경제 등을 익히고 공부하는 맥락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커피가 그러하듯, 생산자와 소비자, 세계를 연결하는 ‘레가토(음과 음이 끊어지지 않도록 연주하라는 음악용어)’가 되고 싶다.

다만, 한 가지 고민되는 지점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착한’ 것인가? 그 문제는 곧 ‘착한 소비’ 혹은 ‘윤리적 소비’로 일컬어지는 용어에 대한 문제제기일 수도 있겠다. 아마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소비와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된 이슈가 이들 용어일 것이다. 대중은 착한 소비라는 개념을 통해 소비의 새로운 효용을 획득했다. 욕망과 동급으로 취급되던 소비였다. 가치는 소비의 몫이 아니었다. ‘소비하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정언명령이었다. 그러던 것이 자본주의의 폐해가 부각되면서 착한 소비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떠올랐다. 소비에서 공익성을 길어 올릴 수 있고, 소비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 부각됐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러나 이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착하다’는 표현의 남발과 오용 때문이기도 하고, 표현의 부드러움을 통해 정서적으로만 소비의 사회적 역할을 다루기 때문이다. 부작용이자 한계다. 소비자들이 잊고 있는 것, 소비를 하면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따져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착한 소비와 윤리적 소비, 분명 가치 있고, 소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이 맞지만,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착한 소비는 세계(경제)의 불평등과 착취 체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가리고 소비를 소비자의 문제로 국한되게끔 만들고 있으니까. 자본주의의 폐해와 부작용보다 근본적 변화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드니까. 착한 소비와 윤리적 소비에 담긴 자본의 작동원리를 파헤쳐봐야 한다. 자본은 이미 이들 단어를 활용해 자신의 맨얼굴을 숨기고 있다. 가격이 싸도 ‘착한 가격’이라고 일컫는 것이 자본이다. 그 착한 가격 뒤에 가린 노동의 착취는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