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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소비의 동반자/사회적기업

'우리미래', 행복을 일구는 사람들

행복을 일구는 사람들 - 한인숙
윤리적 소비 체험 수기 부문
2009년 장려상 수상작

고양시에 일산 신도시와 화정지구가 아닌 고양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양동엔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는 사람들과 그 자녀들이 있고, 그들과 늘 함께 꿈을 키워 나가는 목사님, ‘늘 푸른 교실’이 있습니다. 너무 깊숙이 자리 잡은 곳이라 일산이나 화정지구의 사람들이 찾아가기엔 교통도 좋지 않은 불편한 곳입니다. 그런데 2009년 7월 25일 늘 푸른 교실에 작은 잔치가 열렸습니다. 공간이 작고 많이 낡아있었는데 토지개발공사와 어떤 기업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내부를 새로 단장해 개소식을 열게 된 것입니다. 전 냉큼 달려갔습니다.

제가 늘 푸른 교실 친구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양생협이 일산구와 덕양구를 나눠 덕양구에 덕양햇살생협이 세워진 2005년부터 입니다. 덕양햇살생협은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취지로 소년소녀가장들에게 생협의 물품으로 반찬을 만들어 공급하기로 하였고 도움을 줄 곳을 찾다가 ‘늘 푸른 교실’을 만나게 되었지요. 생협의 기본 단위인 마을모임을 단위로 일   주일에 한 번씩 반찬을 만들어 공급하였습니다. 조합원들은 매 주 모여 수다 꽃을 피우고, 만든 반찬이 너무 맛있다며 자화자찬도 해가며 즐겁게 꾸려 갔습니다. 간혹 공급을 하더라도 빈 집에 놓아두거나 할머님을 만나고 왔기에 우리가 만든 반찬을 먹는 친구의 얼굴은 보기 어려웠지만, 가끔씩 빈 반찬통에 감사하다는 내용의 쪽지는  보람도 느끼게 해주었고, 우리의 귀찮음도 한꺼번에 날려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사랑의 반찬’은 조합원들에게도 자부심을 갖게 하는 주요 사업이 되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루브르전 2007.1.17   루브르박물관에 가기로 약속...이뤄지길

국립중앙박물관 루브르전 2007.1.17 루브르박물관에 가기로 약속...이뤄지길

 
그러던 중 2006년 사회적기업을 지향하는 ‘우리가 만드는 미래’와 제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역사와 문화체험학습이 주로 하는 일인데, 저소득층 공부방 수업을 한다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제가 늘 푸른 교실을 찾아가서 역사수업을 하게 되었지요. 제가 밤새 준비해간 교구와 교재, 알량한 역사 지식은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아이들에게 온 몸과 온 맘으로 정성을 다하시는 목사님의 큰 사랑과 열정에, 기초생활자와 차상위계층의 인원이 어느 다른 공부방보다 많았지만 밝고 활기찬 아이들, 그리고 정말 순수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친구들의 모습에 제가 더 많이 배웠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빈 반 찬통에 쪽지를 보내주었던 여학생도 만났습니다. 중학생이었는데, 초등학교 친구들을 친동생처럼 잘 돌봐주고, “너희 진짜 중요한 수업 받고 있는거야, 열심히 해야 해!”라며 충고도 해주더군요. 부모의 과잉보호 속에 자란 약하디 약한 제 아이들의 모습은 바로 제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늘 푸른 교실에서의 수업 시간은 행복했고, 제 생활의 활력이 되었습니다. 그 뒤로 몇 년이 흘렀지만 역사학자가 되겠다던 재천이, 늘 모범생이면서 생글거리는 연주, 얼굴이 예쁜데 자주 빠져서 나를 안타깝게 했던 여자 친구 등 제 맘속에 늘 있었습니다.

교회 앞에 도착했더니 입구에서 현판을 걸며 풍선을 하늘로 날려 보내며 환호성하고 있었습니다. 공부방 개원한지 6년이 되었는데 목사님의 모습은 새로 공부방을 연 것처럼 충만한 모습이었고 저와 공부했던 아이들은 제 키를 훌쩍 넘겨 중학생이 되어 그 자리에 있더군요. 반듯하게 자란 아이들의 모습이 정말 놀라웠어요. ( 사진 중 네 명이 저랑 공부했던 아이들이네요 재천이 연주···) 반갑게 맞이해 주는 모습에 오히려 미안함이 밀려왔어요.

늘 푸른 교실 개소식 2009. 7.25

늘 푸른 교실 개소식 2009. 7.25


그간 다녀가셨던 여러 과목 선생님들의 말씀들도 한결같이 "늘 푸른 교실은 아름다운 곳"이라 하셨고 목사님도 "이 곳은 좋은 분들이 만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다가와  자주 오세요 하며 포옹도 하고 작은 화분을 건네주었습니다.  난 화분을 들고 오며 내내 들떠있었습니다. 미안하면서도 웬지 나도 그들처럼 열심히 산 것 같기도 하고, 그들처럼 착하고 순수한 사람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협이  없었다면 내가 늘 푸른 교실과 인연이 닿았을까? 1992년 결혼 했을 때 생협은 막 태어났습니다. 폐식용유로 만들었지만 제대로 쓸 수 없었던 비누와 보리, 달걀 등 몇 가지 밖에 없던 물품들, 생협 실무자들은 매일 바뀌고, 생협이 망하기도 하고.... 그랬던 생협은 아줌마가 된 나에게 삶의 실천의 중요한 장이었습니다. 구매대행제도가 시범적으로 실시되어 생협이 자리를 잡아가려던 1997년, 부천생협을 이사로 떠나와야 했습니다. 고양시 덕양구에 자리 잡은 나는 새 집이였지만 생협이 없기에 허전하고  생활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요. 일단 양 옆집을 포함해 다섯 집을 만들어 공급을 요청 했고 작은 생협을 꾸렸습니다. 그 뒤로 많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고양생협은 우뚝 섰고, 2008년 일산에, 2009년 5월 덕양에 조합원의 힘으로 어엿하게 매장까지 내게 되었습니다. 덕양햇살의 매장이 문을 연 그 날도 난 흥분 상태였습니다. 꿈만 같았습니다. 이렇게 생협의 역사는 아줌마활동가들과 아줌마조합원들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조합원의 힘으로 만든 매장이 망하지는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불안하기도 했지만 매장에서 오래된 조합원들의 얼굴을 마주하니 매장 열기를 잘 했다 싶고, 매일 늘어나는 신입조합원들의 모습을 보니 희망이 솟구치고  신바람이 났습니다. ‘우리미래’의 수업도 제법 늘어나 수업준비와 강의로 몸과 마음은 바쁜데, 어느새 난 생협 매장에 가 있고 신입조합원 교육을 통해 만난 조합원 한 사람 한사람을 만나보니 훌쩍 성장한 생협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덕양햇살생협 매장 여는 날  2009.5.20

덕양햇살생협 매장 여는 날 2009.5.20

‘우리미래’는 2007년에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 인증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노동부의 지원을 받지만 십 개월 후 지원은 끊기게 되고 자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지요. 사회에 공헌도 하면서 수익을 내어 자립을 해야 하는 사회적 기업이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합니다. 사회적 기업은 지금 현 사회의 대안입니다. 생협의 역사가 아줌마조합원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사회적 기업도 꼭 만들어지리라 믿습니다. 사회적 기업은 그 기업의 직원만 열심히 뛰어서는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로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고, 낮은 곳의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고 조금이라도 나누고자 하며, 자기의 욕망과 탐욕을 끊임없이 줄이고자  애쓰고, 이 땅의 환경과 농업, 나라의 장래를 책임지고 있는 생협인들이 사회적 기업의 가치를 알고 함께 할 때 ‘우리미래’도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생협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사회적 기업은 성공입니다! 생협과 사회적 기업이 있는 세상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면 그래도 덜 미안할 것 같습니다. 생협과 우리미래를 통해 만들어질 새로운 인연에  기대가 됩니다. 제 삶은 소박하지만 정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