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라오스 루앙프라방 나이트 바자에서 물건을 산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물건 값을 워낙 못 깎기 때문에 정찰제가 아닌 곳에서는 웬만해서는 물건을 사지 않았지만, 소수민족이 만든 예쁜 소품이 많았던 그 시장에서는 사고 싶은 물건들이 많았다.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는 내가 워낙 흥정을 못하니까 무조건 상인이 부르는 가격의 1/4을 부르라고 조언했지만, 차마 그럴 용기가 없어서 절반 가격에서 흥정을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나이트 바자의 상인들이 몇 번의 가벼운 흥정을 거친 후 대부분 내가 부르는 가격에 물건을 내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내게도 가격을 깎는 '놀라운' 재능이 생겨난 것일까? 자신감을 얻은 나는 열심히 흥정을 하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자잘한 선물들을 잔뜩 사들였다. 그런데, 다음 여행지였던 태국 방콕에서 나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라오스보다는 물가가 비싼 편인 태국 방콕에 있는 선물 가게에서, 내가 라오스에서 산 것과 유사한 물건들에 훨씬 저렴한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로 돌아와 보니 제품의 질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예쁘기는 하지만, 급하게 만든 듯 바느질이 성글었고, 질이 좋지 않은 천을 사용한 탓에 몇 번 들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후질근해져서 내팽겨 쳐 버린 게 대부분이었다.
사실 우리나라 물가보다는 워낙 싸기 때문에 얼마 정도 돈을 더 주고 샀다고 해서 그렇게 큰 무리가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조금 더 낸 돈이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 조금 더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마음도 누그러워진다. 다만 그들이 '어리숙한' 나를 이용해 현지 시세보다 높게 물건을 팔았다고 생각하니 억울한 마음이 들고, 나의 '너그러움'이 물건을 만든 이들에게 정당하게 돌아갔을 지에 대한 의문이 들어 마음이 불편해 지는 것이다.
이런 내게 현지에서 만나는 공정무역 가게들은 더욱 반갑고 고마운 존재였다. 현지의 다른 제품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우리나라보다는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품질 좋은 제품을 흥정 스트레스 없이 살 수 있고, 그 수익금은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기 때문에 소비자로서의 보람도 느낄 수 있는 곳!
여러 나라에서 여러 가게들을 둘러보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베트남 호치민시에서 들렸던 '베트남 퀼트'이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공정무역과 공정여행 사업을 벌여나갈 사회적 기업을 준비 중인 선배 덕분에 알게 된 곳으로, 운이 좋게 베트남 퀼트의 마케팅 책임자를 만나 그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호치민시에 있는 베트남 퀼트의 매장은 100% 손으로 만드는 퀼트 제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공간이었다. 2001년에 설립된 베트남 퀼트는 프랑스 NGO '베트남 플러스'와 벨기에 NGO '메콩 플러스'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으로 다양한 퀼트 제품과 수공예 제품을 제작, 판매한다. 캄보디아에서는 메콩 퀼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2001년 호치민시 매장이 처음 문을 열었고, 현재는 하노이와 캄보디아 프놈펜, 시엠리엡에도 매장을 두고 있다. 이들 매장의 수입금 전부는 베트남 플러스와 메콩 플러스가 활동하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농촌 마을들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베트남 플러스와 메콩플러스 사업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1년 수입이 100유로(약 133달러) 이하인 극빈층을 위해 일한다. 둘째,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를 바탕으로 일을 진행한다. 셋째, 적은 비용으로 지속가능한 활동을 이끌어 간다. 즉 외부의 후원 없이 마을 사람들의 수익 사업만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
이 단체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있는 500여개 마을에서 활동을 하는데, 직접적인 수혜자는 약 17만 명으로 구체적인 대상은 유치원과 초등학교 어린이, 여성과 농민, 극빈층 및 장애인이다. 퀼트 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 소액 대출, 농업 기술 지원, 환경보호, 연극 활동, 모기장과 살충제 보급 같은 보건`위생 사업, 유방암 검사와 치아관리 교육 같은 보건 교육, 알코올중독 퇴치 캠페인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모든 활동은 두 단체의 도움을 받아 결성된 현지 NGO와 마을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와 민주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디자인 도용이 쉽게 이루어지는 베트남 시장에서도 베트남 퀼트는 다른 회사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제품은 선진국에서 생산하는 상품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디자인과 품질 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이다. 본사에서는 제품의 디자인, 재료구입, 주문과 판매를 관리하고, 마을 주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는 단위별 작업반을 꾸려 책임자의 꼼꼼한 관리 속에서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무리해서 많은 제품을 만들지 않는다. 마을에서 필요한 경비와 시장 상황에 맞게 고품질의 제품을 소량으로 생산하는 고급화 전략을 구사한다. 서구에서 온 자원봉사 디자이너들의 역할도 고급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호주에서 온 마케팅 책임자 지젤이 여러 번 강조한 베트남 퀼트의 경영 철학은 모든 사업에는 사람을 중심에 놓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사업을 전개해 가는 것이다. 한 땀 한 땀 촘촘한 바느질로, 조각조각 천을 이어 붙여 만드는 퀼트 작품처럼 이들의 사회적 기업은 구성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가득 담긴 따뜻하고 인간적인 바느질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베트남 퀼트에서 사온 제품 가운데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 조카에게 선물로 주었다. 베트남 전통 모자 '논'을 쓴 귀여운 소녀가 퀼트로 장식되어 있는 예쁜 베개보. 선물을 전해 주며 나는 퀼트 장식 그림에서 시작해서 이 물건을 만든 아름다운 사람들을 거쳐, 그리고 공정무역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베개보가 여행한 길만큼 긴 이야기들을 조카에게 들려주었다. 지루해 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준 의젓한 조카가 내 나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우리나라에서도 공정무역 상품이 보편화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으면서...
'이벤트 > 2011 공모전 시민심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반부문] (수기) 윤리적 소비 페스티벌 - 손범규 (0) | 2011.09.18 |
---|---|
[일반부문] (수기) 아내와 제2매장 - 김동윤 (0) | 2011.09.18 |
[일반부문] (동영상) 친환경 농산물을 골라요 - 이훈표 외 3인 (0) | 2011.09.18 |
[일반부문] (동영상) 일상의 윤리적 소비 - 김세형 (0) | 2011.09.18 |
[일반부문] (수기) 소비도 다 같은 소비가 아니다 - 우경정 (0) | 2011.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