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빨간 그날과 녹색 생리대 - 신임수진
윤리적 소비 체험 수기 부문
2009년 장려상 수상작
면생리대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예상치 못한 몇몇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버리느냐 빨아 쓰느냐보다 먼저인 문제는, 내가 나의 생리와 생리혈에 대한 근거 없는 미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나 여성들에게 생리는 귀찮고 불결하고 성가신 일로 소개되었고 그렇게들 믿고 있었다. 일회용 비닐 생리대 광고를 보아도 온통 ‘깨끗해요’, ‘안 하는 것처럼 감쪽같아요’라는 이야기뿐이다. 그걸 사용해야 하는 우리들은 깨끗하지 않은 생리대를 뜯어내 버리기 바쁘고 될 수 있는 한 ‘안 하는’듯이 보이려고 노력한다. 전반적으로 ‘피’에 대한 거부감은 공통의 것일 수 있지만 생리혈처럼 억울하게 미움받고 뒤로 내쳐지는 건 홍길동같은 서자도 ‘형님’할 지경이다.
면생리대 빨래의 첫 단계는 찬물에 베어 나오는 자기 피 마주하기일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내가 만든 면생리대를 구입해 간 친구에게서 야밤에 전화가 왔다. “식구들 몰래 밤에 빨았는데 피가 너무 많이 나와. 물이 쌔빨갛게 됐어. 물 버릴 때마다 너무 놀래.” 다달이 생리를 한지 십수년 만에 자기 피와 첫인사를 나눈 셈이다. 일단 이 첫만남을 잘 넘기면 빨래하기 그 자체는 큰일이 아니다. 사용한 면생리대를 찬물에 담궈 두면 핏물이 쏙 빠진다. 그리곤 그냥 비누로 슥슥 빨면 된다. 물론 이런 것이 큰일은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서 작은 ‘일’이 되기도 한다는 건 인정!
대부분 면생리대에 관해 이야기하려다 보면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근데, 좋은 건 알겠는데, 귀찮아서 어떻게 빨아서 써.” 옷 빨기가 귀찮아서 맨몸으로 다니거나 한 달에 보름 정도만 옷을 입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지금껏 휙 버리던 것을 버리지 않고 손을 한번 더 쓰려니 싫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5년을 쓰면서도 나 또한 종종 귀찮은 마음이 비죽 고개를 들기도 한다. 세상은 우릴 위해 얼마나 ‘편한’ 방법들을 많이 내놓는지!
처음에는 매일매일 그날 사용한 면생리대를 빨아 널었다. 당시는 부모님과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엄마는 내 방에 오셔서 목소리를 죽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도 있고 오빠도 있는데 저렇게 씨뻘겋게 담궈 놓고 있으면 어떻해. 얼른 빨아 널든지 뚜껑이라도 덮어 놓든지.”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고는 남성들도 좀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얼마 뒤 우리집 욕실에는 새빨간 작은 대야가 생겼다. 딸기를 담아 파는 플라스틱 그릇 같았는데 내 면생리대를 담궈 놓는 전용 대야로 마련한 듯 했다. 새빨간 대야는 한동안 내 면생리대를 품고서 대야 색깔과 피 색깔을 쉽게 구분할 수 없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지금은 자꾸 꾀가 난 결과, 사용한 면생리대를 찬물에서 핏물만 빼뒀다가 빨래는 한 번에 세탁기에게 맡긴다. 다른 빨래들과 함께 세탁하기 때문에 그 이후엔 꼭 맹물에 푹푹 삶아 햇빛에 말린다. 면생리대를 모두 말려서 서랍장에 다시 정리해 두는 것 까지 끝나면 비로소 내 생리기간이 마무리된다. 실제 피 흘리는 것으로 시작해서 다음 달을 준비해놓는 것까지이기 때문에 비교적 남들보다 긴 생리를 한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생리하는 날보다 생리안하는 날이 훨씬 많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내가 쓰는 것을 보고, 혹은 귀여운 천으로 만들어진 면생리대를 구경하고는 “그럼, 한두 개만 일단 써볼까?”하는 친구들이 참 많다. 예전에는 그것으로도 조금은 쓰레기를 줄일 수 있고 면생리대 ‘체험’을 해볼 수 있으니 나쁘진 않겠다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지만. 나는 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기왕이면 생리기간 동안 내내 쓸 생각을 하고 시작하길 권유한다. 아직은 익숙치 않으니 시험 삼아 집에서 미리 써보거나 짧은 시간을 써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한두 개만으로 한번 써보고 좋은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써보고 좋으면 나중에 제대로 구비해서 시작하겠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 그 한두 개마저 서랍 깊은 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사람은 자꾸 ‘편한’쪽으로 가고 싶기 마련이니까.
직접 천을 사다가 하나하나 재단하고 재봉틀로 만들고 다리미로 다려서 면생리대를 완성하는 일은(그런 날 나는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작업한다) 어쩌면 나에게 휴식이고 녹색을 퍼트리는 일이고 괜찮은 아르바이트다. 주위 사람들에게 면생리대를 권유하고 정성들여 만든 것을 팔기도 하면서, 이것으로 한 뼘쯤은 더 녹색이 되고 자기 피를 마주하는 친구가 한명 더 늘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스윽 웃음이 난다. 아주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다. 하면 하는 것이고,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다. 빨래나 번거로움이나 생리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런 저런 것들은 그저 그것들일 뿐이고, 그래서, ‘내가’ 할까, 말까.
우리가 결정할 것은 이것이다. 일단 해보는 건 어떨까. 나중에 정 아니면, 다시 돌아올 길은 너무도 많을 테니까. 그리고 그 많은 길이 사실은 길이 아님을 알게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결심에 필요한 시간이 길었던 친구도, 어렵게 어렵게 찡끗거리며 시작했던 친구도 결국은 그 쉬운 길로 돌아가지 않았다. 내가 그런 것처럼. 그래서 우리 길은 느리지만 조금씩 다져지고, 더 많은 가지를 뻗는 중이다. 녹색생리대와 함께하는 그 길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래본다. 그리고 툭 묻는다. “그래서, 함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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