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청소년부문 수상작
윤리적 소비 자유분야 수기 부문
공정여행속엔 윤리적 소비가 콸콸콸!
(임은희)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나는 6주 동안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어학연수 중, 주말을 제외하고는 거의 호텔 안에서 생활을 했다. 호텔 안에서 밥 먹고 아떼(필리핀 어로 나이 많은 여자를 지칭, 가사도우미를 뜻하기도 한다)가 치워주는 방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여기가 한국인지 필리핀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주말이면 필리핀 관광지를 여행하는 시간도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신 고급 렌트카를 타고 원주민들과 식사를 하기보다는 입맛에 맞는 먹거리로 식사했고, 유명관광지를 우루루 몰려 다니곤 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나만 즐거운 여행을 했던 것 같다. 이런 여행을 하면서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필리핀 가고 싶다", "필리핀 음식 먹고 싶어"라는 말을 매일 하곤 했다.
필리핀에 대한 나의 동경은 너무도 간절했다. 결국 나는 사회적기업 공감만세라는 여행사와 공정여행으로 다시 필리핀을 찾게 됐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도 나는 공정여행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겁이 났다. 하지만 공정여행이 무엇인지,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필리핀에 대해 알아보며 여행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간 것이 나중에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필리핀은 반 세기 가까이 스페인, 미국, 일본 그리고 다시 미국의 식민 강점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우리의 품앗이, 두레와 유사한 필리핀의 ‘바야니한’ 공동체 정신은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했고, 혈연을 중심으로 뿌리 깊게 이루어진 가족형 공동체는 단순한 핏줄이 아닌 사회를 이루는 뿌리라는 생각에 미쳤다. 환상적인 해상지형, 수많은 지하자원, 태평양과 인도양을 잇는 황금 해상루트는 필리핀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줬다. 공정여행을 준비하면서 알게 된, 필리핀에 대한 여러 사실들은 가난하고 게으르다는 편견을 없애주고, 호기심이 가득한 채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기에 충분했다.
공정여행이란, 관광객들이 여행 경비를 현지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숙소에 사용하며, 인권·생명을 존중하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여행을 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는 일명 '착한여행'이다.
공정여행의 원칙 첫 번째 비싼 고급항공기를 타고 가는 것보단 그 나라의 국적기, 필리핀 항공을 이용하였다. 필리핀항공은 앞 뒤 간격도 좁고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책상에 누워서 자기도 해보고 옆으로도 자기도 해봤지만 불편한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도 자국기를 이용함으로써 고용창출을 한다는 그 의미를 알면 몇 시간동안은 충분히 감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도착 후,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필리핀 사람이 운영하는 렌트카를 타고 가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500m 간격으로 보이는 졸리비, 초등학생 뻘 동생들이 맨발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필리핀 국립대학에서 운영하는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아침에 숙소에서 차려준 밥을 먹고 오늘의 일정을 들으면서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호텔에 대해서 들었다. 이 호텔은 수익금은 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인다고 했다.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들 중 일부도 근로장학생 형태로 대학생들을 고용한단다. 여행을 가면 항상 최고급 호텔에서 편안하게 묵어야 여행다운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조금은 낡고 불편했지만 이윤을 장학금으로 환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오히려 이 호텔의 이용객이 많아져서 많은 학생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계단식 논을 보기위해 밤을 새워 바이니난 마을로 달려온 버스에서 내려 보니 새벽 4시, 공정여행의 두 번째 원칙인 현지 주민들과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홈스테이를 하기 위해 집으로 이동했다. 집주인 할머니께서 이푸가오 전통가옥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모두 둘러앉아서 할머니께서 해주시는 음식을 나눠 먹었다. 필리핀에서 직접 해먹는 음식의 맛은 달랐다. 식당에서 사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고 우리 할머니가 해주는 것 같았다. 팩키지 여행속에서는 단체로 이동하고, 대형 식당에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다같이 호텔로 이동하는 것과는 달리 현지 주민들의 삶속에 가까이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사하면서 우리는 여행다운 여행 속으로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필리핀 대중교통인 트라이시클(오토바이에 사이드카를 달아 개조한 교통수단)을 타고 계단식 논을 보기위해 약 2시간여 트래킹을 했다. 여전히 비는 주룩주룩 오고, 미끄러운 길이었지만 공정여행의 세 번째 원칙 여행을 위해 파괴되는 지구와 지역을 복원하는 작업에 참가하기 위해 당차게 걸었다. 말로만 들었던 계단식 논을 보자마자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트레킹 내내 힘든 줄 모르고 우리는 계단식 논의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우리의 유산을 지킵니다”, “이푸가오의 계단식 논을 지킵니다” 라는 슬로건을 걸고 활동하는 ‘시트모(SITMo: Save the Ifugao Terraces Movement :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 본부 / 유엔계발계획 협력 기구이자 국제 NGO)' 이들은 그들의 터전인 계단식 논이 알려진 뒤,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뿌리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활동하는 청년들이라고 했다. 우리는 태풍으로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는 계단식 논 복원작업을 시작했다. 한 줄로 나란히 서서 돌덩이들을 나르고, 한 줄씩 뚝을 쌓고, 그 뚝이 무너지지 않게 발로 밟아주는 과정을 번갈아 가며 진행했다. 식사를 할 때에는 전통방식 대로 방아를 찧고, 쌀을 볶은 뒤, 바나나 나무 껍질을 접시 삼아 이푸가오족 전통 음식을 먹었다. 우리가 도움은 커녕, 일을 더 만들고 온 것이 아닌가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공정여행을 통해 그들의 무너져 가는 논을 복원하려는 우리의 마음이 전해졌길 바랄 뿐이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축제를 열어주었고, 나를 비롯한 여행참가자 모두는 그 축제의 분위기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여행의 마지막 여정은 필리핀의 대중교통인 지프니(미군의 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교통수단)를 타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바나우에 계단식 논을 보러갔다. 녹색 계단을 지나치며 필리핀 지폐 1000폐소 뒷면에 있는 세계 8대 불가사의 계단식 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바나우에 계단식 논에 도착했다. 지금껏 본 것 중에 가장 경치가 아름다웠다. 3천년간 맨손으로 계단식 논을 일구어 온 이푸가오족의 놀라운 삶이 존경스러웠다. 하지만 무분별한 개발과 관광객에 의해 파괴되고 인위적으로 변하고 있어서 안타까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위험에 처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나우에 계단식 논이 많은 관광객에 의해 파괴되고 있지만 '시트모'와 함께 우리와 같은 여행객들이 바른 인식으로 인해 더 이상 계단식 논의 훼손 되는 일이 없길 바랬다.
바나우에 수공예 거리에서 공정여행의 네 번째 원칙인 지역의 생산품을 소비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와 공익성을 도모하기 위해 수공예품 거리에서 쇼핑을 했다. 맛있는 간식과 가족들을 위해 줄 선물을 구입하며 정신없이 쇼핑을 즐겼다. 이 수공예품 거리에서 수공예품을 판매한 수익은 현지 아이들이 학교 교육을 위해 쓰인다는 여행사 대표의 설명을 듣고 마음껏 쇼핑을 할 수 있었다. 여행이 마무리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우리는 같이 여행간 친구들과 남은 폐소를 모아 여행사에서 지원하는 공부방 동생들을 위해 기부를 하기로 했다. 우리돈 오만원 정도면 6개월간 공부방에서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남은 폐소가 모아져서 한명의 동생이 우리와 같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랬는데, 다행히도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우리와 필리핀 친구들이 공부를 하면서 꿈을 키워간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공감만세 대표 고두환 선생님과 짧은 대화를 했다. 고두환 선생님의 소망은 나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정여행을 하게 되어서 자기 회사가 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회사를 더 키우고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나는 이 말을 듣고 몸이 짜릿했다. 그리고 고두환 선생님께 몇 년 뒤에 공감만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사회적 기업을 만들테니 잠시 기다려 달라고 나의 포부를 밝혔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많이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정여행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나부터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평소에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걷는 것을 실천하고 있다. 이렇듯 공정여행속엔 윤리적 소비가 콸콸콸 넘쳐나고, 나의 꿈도 콸콸콸 넘쳐나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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