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의 협동조합 전도사"
은행에서 부자들 돈을 관리해주는 자산관리 전문가들 중엔 사회공헌, 기부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다 죽고 싶진 않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문의하는 자산가들이 있다더군요.
'모태신앙'인 사회적 경제 전도사, 김기섭 선생이 그런 분들을 본다면 '그건 인간이라는 생명체 안에 수백만년 동안 각인된 DNA탓'이라고 풀이해줄 겁니다. 사람은 공부 잘하고 돈 버는 재능을 공동체에 쓸 수 있어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 있어야 행복한 법이라는 말씀이죠.
증거요?
제가 보기엔 김 선생의 삶이 증거인 것 같습니다.
그는 자칭 '모태신앙'의 사회적 경제인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등 생명사상가들과 협동조합 활동가들이 활동하면서 국내 사회적 경제의 씨앗을 뿌린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김 선생은 대학과 유학 시기를 거쳐 두레생협 등 사회적 경제 진영에서 줄곧 일했습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50여년의 세월을 다 바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하게 한, 사회적 경제란 뭘까요? 김 선생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근간인 경제'라고 설명합니다. 그건 '다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돌아가는길'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그의 꿈과 삶 이야기를 이로운닷넷이 전해드립니다.
* 특징 : 1963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의 사회적 경제 전도사. 일본과 한국을 아우르는 협동조합 현장 체험. 어지간한 기자보다 맛깔나게 글 쓰는 실력.
*주요업적 : 국내외에 협동조합, 공정무역 등 사회적 경제 이슈를 널리 알림. 상지대 강사. <깨어나라!협동조합> 저자.
‘일’이란 것이 밥벌이를 가리킨다면, 에이피넷에서 제3세계와 우리나라와의 대안적인 교역과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을 통해 감사히 밥벌이를 하고 있습니다.
‘일’이 밥벌이만이 아니라 정말로 관심을 가지고 집중해서 하고 있는 요즘의 것을 가리킨다면, 한편에서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제 나름의 새로운 모색과 대안을 찾아가면서 이를 바탕으로 제가 놓여 있는 삶의 공간, 즉 에이피넷에서 하고 있는 민중교역과 같은 일 속에서 이를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실천하고 나아갈지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요즘 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나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요즘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인해 나는 죽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두레생협이라는 사회적 경제 진영에서 십여년 넘게 일했을 때, 생협이나 사회적 경제에 대한 사랑은 내게 구체적이지 않았고 또 내 문제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조직의 문제였고, 운영의 문제였습니다. 조직과 그 조직의 운영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우선할 때, 조직은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요즘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예수의 이야기를 자주 떠올립니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내버려 둔 채, 길 잃은 한 마리 어린 양을 찾아나서는 예수의 행위는 조직과 그 운영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의 무리보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더 사랑했고, 마침내 가시밭길을 헤집고 그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남겨진 아흔 아홉 양의 무리가 왜 걱정되지 않았겠습니까? 가시밭길을 헤집고 찾아나서는 줄도 모르고 제 갈 길만 태연히 가는 어린 양이 왜 야속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사랑으로 인해 죽을 맛일 텐데도 예수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찾아 나섭니다. 예수의 사랑은 매우 구체적이고 바로 내 문제입니다. 사회적 경제 진영에서 한발 떼어내서야 비로소, 사회적 경제가 닮아야 할 가장 핵심적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의 의미가 계속 걸리네요. 일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가 일인지에 따라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변이 달라질 것입니다. 만약 일이 밥벌이 즉 시쳇말로 직장을 의미한다면, 1993년에 발 디딘 생활협동조합중앙회가 제 첫 밥벌이 직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밥벌이는 못하고 그저 밥이나 축내고 살았으니까요. 그 때부터가 아마 사회적 경제 진영에 본격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이 밥벌이만이 아닌 삶 자체를 의미한다면, 사회적 경제 진영에 발을 디뎌놓은 것이 언제부터냐는 질문보다는 사회적 경제 진영에서 발을 뺀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시는 것이 맞을 듯싶습니다. 어려서부터 강원도 원주라는,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독특하게 사회적 경제가 창궐했던 곳에서 태어나 그 품안에서 살았고, 그 이후에 대학과 유학 시기를 거쳐 줄곧 사회적 경제 진영에서 일해 왔으니까요. 사회적 경제는 제게 일종의 모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모태 신앙인’들이 한두번 겪는 것처럼, 저도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1980년대 초반의 대학가는 그야말로 살의가 판치는 세상이었으니까요. 그런 속에서 사랑이니 협동이니 생명이니 하는 것은 정말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한낱 사치처럼 느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사회적 경제에 대한 더 깊은 사랑을 낳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단지 저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 경제의 품 안에서 태어나고 또 자랍니다. 사랑이 우리를 낳고 또 기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하면서 차츰 사회적 경제 품에서 벗어나 시장이나 계획(국가) 경제의 노예가 되어갑니다. 시장이나 계획 경제 진영에서 얼마나 잘 나가느냐가 인생 성공의 가늠자처럼 보입니다.
금의환향이란 말이 있습니다. 시골 촌구석에서 자라나 열심히 노력한 끝에 무슨 고시에 합격하거나 큰돈을 벌어 비단옷을 두르고 고향에 돌아옵니다. 그렇게 돌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낳고 길러준 고향과 사회적 경제를 계도와 탈피의 대상으로 여깁니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이미 고향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죠. 그런 사람은 고향을 위해서도 또 자신을 위해서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고시에 합격하고 큰돈을 버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공부 잘하고 돈 버는 재능을 고향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행복한 법입니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생명체 안에 수백만년 동안 각인된 DNA입니다.
글쎄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일종의 모태 신앙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적 경제의 길로 잘못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 이제는 차츰 그 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새로이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 그런 확신과 기대가 커지고 있습니다.
제 꿈은, 자본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이탈시킨, 혹은 자본으로부터 강압적으로 배제당한 사람들 간의 평등한 연대, 그리고 그런 연대를 통해 각자가 나름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본이 온 세상을 구석구석까지 지배하고 있는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삶을 꾸려가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결단과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세상에는 자본이 의도적이고 강압적으로 배제해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 자존감마저도 잃어버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난하고 쓸쓸한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삶의 공간인 지역에서 연대하고, 또 그런 연대가 지구적으로 평등하게 서로 도와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지역에서의 작은 연대가 굳건히 서고, 나아가 이를 통해 그곳에 모인 각각의 사람들이 나름의 행복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일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회적 경제를 통해 제가 이루고자 하는 꿈입니다.
사회적 경제가 일종의 모태 신앙인 저에게는 이 일을 하게 한 계기나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사람을 예로 들어 말씀드린다면, 강원도 원주에서는 장일순, 김영주, 김지하 선생님, 일본에서는 야스다 시게루, 유키오카 요시하루, 홋타 마사히코 선생님 같은 분들이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님(생명운동가이자 한살림 창립멤버)은 삶의 지표와 같은 분이고, 김영주 선생님(민주화운동가)은 그런 삶을 현 사회에서 조직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경영자와 같은 분입니다. 김지하 선생님(시인 겸 생명운동가)은 그런 조직과 운동의 논리를 세워주신 분입니다. 일본의 야스다 시게루 선생님(고베대학 명예교수)은 유기적 삶과 실천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고, 유키오카 요시하루 선생님(그린코프연합 고문)은 이를 생협이라는 조직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방안을 일러준 분입니다. 일본대안무역(ATJ)의 설립자 중 한 명인 홋타 마사히코 선생님은 이런 조직의 방식을 지역과 국가를 넘어 세계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줬습니다.
사회적 경제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경제를 형성하는 요인이라는 점에서, 자본이나 권력 등과 같은 무기적 성격의 것이 지배하는 경제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유기적인데 그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또 얼마나 더 유기적이겠습니까? 비닐하우스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듯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과, 시시각각 일변하는 기상과 기후 조건 하에서 다양한 작물이 모두 잘 되게 재배하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유기적이라 함은 그렇게 작물의 다양성, 작물 간의 관계성, 외부로 열려진 개방성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경제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 간의 다양한 '관계'들이 있으며, 이런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항상 밖을 향해 열려져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한마디로 살아 있다는 것이죠. 살아 있음으로 해서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있는 법입니다. 물론 가끔은 살아 있는 것이 지겨울 때가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쁨을 가져다 줬던 것이 노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는 슬픔으로 왔다가도 어느새 즐길 수 있는 상황으로 돌변합니다.
부처님 오신날에 한 방송에서 라다크의 의승(醫僧)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는 라다크 오지들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합니다. 산골 오두막에 한 노인이 병앓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혈압 때문인데, 실은 가족을 잃거나 타지로 떠나보낸 쓸쓸함이 병을 키운 원인이었습니다. 일단 몸의 병을 치료해주고, 마음의 치유를 위해 며칠 머물며 말벗이 되어줍니다.
그 의승의 말이 놀랍습니다. “병은 살아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랍니다. 죽으면 병에 걸릴 일도 없다는 거죠. 살아 있음에 감사하듯이, 병은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는 겁니다.
노여움과 슬픔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과 함께 오는 것입니다. 노여움과 슬픔을 없애려고 비닐하우스에서 작물을 재배하거나 자본이나 권력에 의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의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희로애락이 왜 없겠습니까만, 희로애락은 사회적 경제가 사회적인 경제임을 반증하는 소중한 것입니다.
엊그제 법정 스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나왔습니다. 그분 말씀 중에 세상에서 제일로 멋진 죽음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시면서 ‘천화(遷化)’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중이 길을 가다 지쳐 쓰러집니다. 약초꾼들도 다니지 않는 험준산령을 넘어가다, 끝내는 더 이상 갈 기력을 잃고 쓰러집니다. 그 때 그나마 기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마른 나뭇잎 긁어모아 그 위에 몸을 뉘어 이승과 작별하는 것. 그것이 가장 멋진 죽음이라 하십니다. 잘 되면 좋지만 잘 안 되도 할 수 없는, 그렇게 살다가 갈 생각만 있다면 무슨 희로애락이 따로 있겠습니까? 개인사를 묻는 질문에 엉뚱한 답변만 늘어놔서 죄송^^
사람은, 아니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다 사회적 경제의 히어로입니다.
사회적 경제란?
사회적 경제란, 사랑, 우애 그리고 연대의 경제입니다. 우리는 시민사회의 발흥을 프랑스혁명에서 찾습니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은 자유, 평등, 우애입니다. 이 3가지 정신은 그저 듣기 좋은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민의 입장에서 볼 때, 자유란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교환을 말합니다. 평등이란 국가라는 제도화된 권력 앞에서의 평등입니다. 한마디로 자유는 시민이 시장과 관계하는 방식이고, 평등이란 시민이 국가와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이에 대해 우애란, 시민과 시민이 관계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자유든 평등이든 우애든 모두 봉건적 질곡으로부터 깨어난 시민이 있음으로 해서 마련된다는 점입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나'라는 존재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나'라는 존재 간의 우애와, 그런 우애를 바탕으로 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교환과 권력 앞에서의 평등이 마련되는 법입니다. 주체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평등한 사람들 간의 우애와 사랑을 통한 관계, 그것이 바로 협동조합이고 사회적 경제입니다. 협동조합이든 정치운동이든 모든 운동은 항상 주체화, 자기조직화, 사업화(정치화), 탈사업화(탈정치화)라는 네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고, 나아가 그것이 조직/기구/사업을 통해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드러난 조직/기구/사업 등이 스스로를 탈조직화 탈사업화시키면서 다시 주체를 강화시키는 방향입니다. 다시 말해 다시 사람 개개인에게로 돌아가느냐 마느냐에 협동조합이든 사회적 경제의 생명줄이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깨어나라 협동조합>이란 책에서 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야기는, “사회적 경제란 사회적인 경제, 즉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이 곧 경제 행위의 근간인 경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미 조직이나 기구로서 마련된 사회적 경제는 다시 사람, 다시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이피넷(APNet)은 민중교역을 통해 생명과 평화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올리브유, 필리핀 네그로스의 설탕 등 개발도상국 중에서도 핍박 받는 지역의 생산품을 공정한 가격에 수입해 합리적인 가격으로 국내 소비자한테 공급하고 있다.
by 이로운넷 (사회적기업들과 함께 만드는 대안경제 미디어)
'윤리적 소비의 동반자 > 사회적기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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