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나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처절하게 절규했다. 음식을 얼게 할 만큼 강렬한 냉기도 나의 분노를 식힐 수 없었다. 벌써 쓰레기차 더미에 실려 어딘가에 묻혔거나 사라졌을 테지만, 그걸 천연 조미료라 여기고 갖은 음식에 넣었던 나로선 배신감과 죄책감에 자꾸만 화가 났다. 아침마다 딸아이 밥 위에도 듬뿍듬뿍 뿌려주곤 했는데. 그게 다 가축 사료로 쓰거나 폐기해야 할 채소였다니. 나뿐만 아니라, 백화점과 마트에서 “아이들 이유식이나 주먹밥에 넣으면 아주 그만”이라는 ‘불량 맛가루(후리가케)’를 사 먹인 엄마들의 정신적 충격은 참담할 정도다. 핑계를 대자면 시식을 한 것이 문제였고, 입이 짧은 아이가 너무나 맛있게 잘 먹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걸 신주단지 모시듯 냉동실에 넣고 떨어지면 사다 두고, 또 사다 두었다. 그러니 냉장고 앞에 설 때마다 원통해서 사자처럼 포효할 수밖에.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그래도 생협이 있으니 다행이지 않느냐고. 그 말은 4년 넘게 조합원인 내가 생협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그동안 나에게 생협이란 친환경 식재료나 과일, 간식 등을 파는 마트일 뿐이었다. 그래서 협동조합이나 윤리적 소비, 수매 선수금 등 낯선 단어와 부딪힐 때면 호기심보단 무관심으로, ‘내가 필요한 물건만 사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불량 맛가루’ 파문으로 식자재는 물론 그걸 만든 사람까지 믿고 살만한 곳이 절실해지자, ‘소비자 생활 협동조합’이라는 생협이 존재하는 이유와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활동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그중 매달 여러 품목을 불시에 검사해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내가 받은 충격을 덜어내고 신뢰를 주었다. 자연재해를 입거나 작황이 좋지 않은 작업장에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모습, 도움을 받은 분들의 감사인사는 감동 그 자체였다. 그리고 우리쌀, 우리밀의 생산과 소비를 늘리기 위해 그동안 모인 출자금으로 생협만의 자체적인 공장을 짓고 라면과 만두, 막걸리 등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을 보며 바로 이게 협동조합의 정신이 아닐까 싶었다. 땀으로 맺은 결실이 헛되지 않도록 서로 가진 걸 조금씩 나누는 일이 바로 윤리적 소비란 생각도.
얼마 전, 처음으로 수매선수금에 참여했다. 품이 많이 든다는 친환경 농법을 고수하고,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자연 앞에서도 다시 일어서주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분들이 웃으며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도록. 아니, 이분들이 있기에 나는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니 내가 도움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생협의 고마움을 다시 한 번 알게 해 준 남편에게는 아주 오랜만에 선물도 했다. 그동안 몸에 좋지 않은 자판기 커피를 마신다고 잔소리만 했는데, 기왕 먹는 거 좋은 거 마셔야하지 않겠냐고 출근하는 남편 손에 공정무역 커피를 들려준 것이다. 그러자 “커피 맛이 다 거기서 거기”라며 멋쩍게 받아 들던 남편이 집에 와선 깔끔하고 향이 좋다며 아주 만족해했다. 회사 사람들도 한번 맛을 보더니 컵을 가지고 와서 두 스푼만 달라고 한다며. 나는 우리가 그 커피를 마시면, 강제로 노동착취를 당하던 커피재배농가가 정당한 대가를 받고,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남편은 다음에는 두 병씩 사다달라며, 명절 선물도 공정무역 커피로 하자고 했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남편 얼굴이 환해보이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후광이 남편을 ‘진정한 훈남’으로 바꿔놓았다.
요즘은 생협 홈페이지에서 장을 보는 날이 많아졌다. 매장에 가려면 두 아이를 데리고 차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지만, 가까운 대형 마트에 가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서다. 마트가 조금 더 저렴할 진 몰라도 물건을 사고파는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그러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윤리’는 가격 차이와 비교할 수 없는 ‘의리’ 같은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전에는 필요한 것만 얼른 찾아 장바구니에 담곤 했는데 이제는 ‘책임소비’ 물품부터 확인하고, 공지사항과 공동구매도 하나하나 살핀다. 조합원이라는 자부심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순간이다. 아이에게 “먹지마라”는 말 대신 초콜릿과 사탕, 과자도 기쁜 마음으로 줄 수 있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오늘은 지난 소식지를 우연히 넘겨보다가 와인과 맥주에 대한 내용에서 눈길이 멈췄다. 세계 최초로 공정무역 인증을 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 ‘탄디와인’이 생협에 공급된다는 짧은 기사였는데 커피와 초콜릿, 마스코바도(유기원당)에 이어 와인까지 공정무역세계를 섭렵해 나가는 생협의 저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맥주에 대한 소식은 수입 보리에 밀려 설 자리를 잃고 재고로 쌓여가는 우리 보리의 생산과 소비를 늘리기 위해 생협이 보리 농가의 수확과 유통을 책임지고, 국내 보리로만 만든 맥주 ‘라거’와 ‘에일’을 개발, 출시했다는 것이었다. 캬, 세상에. 아직 맛도 보지 않았는데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이렇게 서로 돕고 나누다 보면 모두가 잘 사는 그런 따뜻한 날이 꼭 올 거라는 확신이 섰다.
다가오는 내 생일에는 꼭 탄디와인과 라거, 에일을 마셔봐야겠다. 술은 절대 섞어먹지 말라고 회식이 잦은 남편에게 누누이 말했었는데 이 날 만큼은 내가 좀 대책 없이 맘껏 즐겨보고 싶다.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남편에게 모두 미뤄놓고. 아, 얼마만의 음주인지 생각만으로도 벌써 취한 것 같다. 기왕 취한 김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비밀을 하나 털어놓자면, 둘째가 유치원에 가는 그 날로 나도 생협에 취직해야겠다. 교육도 받고, 캠페인도 참여해서 먹는 걸로 사람 속이는 불량한 양심은 모조리 無방부제, 無첨가 되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싶다.
오늘 밤은 나 자신을 위한 윤리적 소비를 꿈꿔야겠다. 내 미래에 생협을 그려 넣는 일이 바로 그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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